브랜딩/마케팅 업계에서 피치는 원래도 체력전이지만, 최근에는 “명확한 브리프 → 제안 → 평가”라는 선형 흐름이 무너지면서 피치가 ‘실시간 컨설팅’처럼 길어지는 상황이 자주 이야기됩니다. 특히 회차가 늘어날수록 질문이 범위를 벗어나고, 회의마다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느낌(일명 ‘움직이는 골대’)이 누적되면 팀의 피로도와 기회비용이 급격히 커질 수 있습니다.
피치가 ‘끝나지’ 않게 되는 배경
어떤 글에서는 한 브랜드와 한 학기 동안 다섯 번째 피치 미팅을 준비하는 상황이 공유되기도 했습니다. 초반에는 브리프가 비교적 명확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경쟁사 사례 평가, 과거 실패 캠페인 회피, 갑자기 떠오른 트렌드 대응 등 즉석에서 전략을 풀어내야 하는 질문이 늘어나면서 “피치라기보다 라이브 전략 회의”처럼 느껴졌다는 맥락입니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클라이언트가 까다롭다”로만 환원하기 어렵습니다. 의사결정 구조, 내부 이해관계, 리스크 회피 문화, 그리고 최근의 AI 도구 확산까지 겹치면, 피치가 ‘검증의 연속’으로 길어지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왜 골대가 움직이는가: 구조적 원인
피치 후반에 기준이 흔들리는 이유는 대체로 아래의 조합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동한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 의사결정자가 바뀌거나 늦게 합류: 중간부터 “그건 내가 처음 듣는다”가 나오면 기준이 재설정됩니다.
- 조달/구매(Procurement) 논리의 개입: 아이디어보다 리스크·비용·정합성 검증이 커지면 질문이 ‘방어형’으로 변합니다.
- 내부 정치와 책임 회피: 실패 경험이 있는 조직일수록 “누가 책임지나”가 질문의 바탕에 깔립니다.
- 브리프가 ‘문제 정의’가 아니라 ‘희망 사항 목록’: 초반엔 넓게 던지고, 뒤에서 좁혀가며 검증하려는 흐름이 생깁니다.
- 경쟁사·트렌드 불안: 외부 변수(경쟁 캠페인, 업계 뉴스)가 내부 불안을 자극해 방향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피치 후반의 ‘돌발 질문’이 반드시 악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질문이 계속 쌓이면, 피치의 목적(선정)과 활동(무료 전략 제공)이 뒤섞여 경계가 흐려질 위험이 커집니다.
“이건 ChatGPT에도 물어봤는데요”가 등장할 때
최근에는 내부에서 AI 도구로 사전 검증을 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늘었습니다. 문제는 회의 중간에 “AI는 이렇게 말하던데요”가 결정 기준처럼 작동할 때입니다. 이때 실무자 입장에서는 “AI가 틀렸다”로 맞서는 순간 대화가 감정전이 되기 쉽고, 반대로 “그렇네요”로 따라가면 권위와 논지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프레이밍은 ‘AI의 답을 반박’이 아니라 ‘검증 조건을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 전제 확인: “AI가 어떤 시장/타깃/채널 전제를 두고 답했는지”를 먼저 질문합니다.
- 데이터 범위: “내부 데이터(고객 VOC, 판매/전환, 브랜드 리프트 등)가 반영됐는지”를 구분합니다.
- 의사결정 기준화: “그 답을 채택한다면 성공/실패를 무엇으로 측정할지”를 합의로 끌어옵니다.
- 대안 비교: AI의 제안을 포함해 2~3개의 옵션으로 구조화하고, 장단점을 동일 프레임으로 비교합니다.
늦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위험 신호’ 읽는 법
후반 피치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래 신호가 누적되면 “추가 회의 = 추가 비용”이 되는 비율이 커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누가 틀렸나’를 가리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를 다시 고정하는 것입니다.
| 신호 | 현장에서 보이는 모습 | 해석될 수 있는 의미 | 추천 대응 |
|---|---|---|---|
| 질문이 범위를 계속 확장 | 경쟁사 광고 평가, 트렌드 대응, 위기관리까지 즉석 요청 | 브리프가 불충분하거나 내부 불안이 크다 | “오늘은 판단 기준 확정”으로 의제 전환, 추가 요청은 범위로 분리 |
| 결정권자/평가자가 매번 달라짐 | 회의마다 새로운 이해관계자 등장 | 내부 정렬이 안 됐을 가능성 | 최종 의사결정자, 평가 항목, 가중치 확인 요청 |
| ‘이전에 실패한 사례’가 모든 판단의 기준 | “그거 예전에 안 됐는데?”가 반복 | 리스크 회피가 과도해졌을 수 있음 | 실패 원인(맥락/조건)을 분해해 재발 방지 조건으로 전환 |
| AI/툴 검증이 권위로 작동 | “ChatGPT는 다르게 말하던데요” | 검증 프로세스가 필요 | 전제·데이터·측정 지표로 논점을 이동 |
| 예산·범위·일정이 끝까지 불명확 | “예산은 나중에요” + 회의만 반복 | 검토가 ‘탐색’ 단계에서 멈춰 있음 | 최소한의 범위/예산 범주(레인지) 없으면 리스크 공지 |
실무 대응: 밀리지 않으면서 유연해지는 운영법
후기 단계에서 완벽한 덱 하나로 버티기 어려울 때, “모듈형 자료 + 의제 운영”이 체감 피로를 줄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즉석에서 다 답한다”가 아니라, 답의 형태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회의 전: ‘놀랄 질문’을 의제로 바꾸기
- 의제 선제안: “이번 미팅 목표(결정/정렬/검증)를 무엇으로 둘지”를 메일/캘린더에 명시합니다.
- 평가표 요청: 평가 항목(전략/크리에이티브/운영/비용/리스크)과 가중치가 있으면 공유를 요청합니다.
- 자료 모듈화: 케이스 스터디, 채널별 접근, 리스크 관리, 측정 프레임을 “짧은 카드”로 준비합니다.
회의 중: 즉답보다 ‘조건부 답’으로 범위 고정
- 조건을 붙여 답하기: “그 전제가 맞다면 A, 다르면 B”처럼 분기 구조로 답하면 즉석 답변의 위험이 줄어듭니다.
- 결정 포인트를 되돌리기: “지금 답을 고르려면 어떤 지표로 판단할까요?”로 합의로 끌어옵니다.
- 범위 분리: 회의 말미에 “오늘 확정된 것/추가로 필요한 것/추가 범위”를 3줄로 정리합니다.
회의 후: ‘추가 질문’이 계약 전제인지 확인하기
회의가 늘어날수록 질문은 자연스럽게 늘 수 있습니다. 다만 질문의 성격이 “선정 판단에 필요한 정보”인지, “실행 단계의 전략 설계”인지 구분이 필요합니다.
| 질문의 성격 | 대표 예시 | 권장 처리 |
|---|---|---|
| 선정 판단(필수 검증) | 핵심 타깃 정의, KPI 우선순위, 내부 승인 라인 | 짧은 문서/슬라이드로 답변 + 회의 목표에 포함 |
| 실행 설계(범위 확장) | 채널별 콘텐츠 캘린더, 상세 메시지 아키텍처, 위기대응 매뉴얼 | “선정 후 워크숍/유료 디스커버리로 전환” 제안 |
| 리스크 회피(불안 해소) | 과거 실패 사례 재검증, 경쟁사 반응 예측 | 전제·조건·측정 지표로 재구성, 실험 설계로 전환 |
철수·보류를 결정하는 기준을 문서화하기
피치에 계속 참여할지, 어느 시점에서 보류할지는 감정이 아니라 기준으로 관리되는 편이 안전합니다. 팀 규모가 작을수록 한 번의 장기 피치가 다른 프로젝트 전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기준은 “상대가 나쁘다”를 선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팀 리소스를 보호하고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한 내부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 회의 회차/투입시간 상한: 예) “N회 또는 총 투입시간 X시간 초과 시 재평가”.
- 필수 정보 체크리스트: 예산 범주(레인지), 일정, 최종 의사결정자, 평가 기준이 없으면 위험도 상향.
- 범위 확장 시 전환 규칙: 실행 설계 수준의 요청은 “유료 디스커버리/워크숍”으로 전환.
- 아이디어/산출물 권리 인식: 제안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의 사용 범위에 대한 기본 입장 정리.
참고할 만한 가이드(공신력 있는 자료)
피치와 리뷰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업계 단체들이 모범 사례를 정리해 둔 자료들이 있습니다. “정답”이라기보다, 내부에서 기준을 만들 때 참고 프레임으로 유용할 수 있습니다.
- ANA: 에이전시 서치/리뷰 프로세스의 모범 사례 가이드
Best Practice Guidelines for Agency Search Consultants - 4As: 뉴비즈 과정에서 생성된 아이디어/산출물에 대한 권리와 관행 정리
Best Practice Guidance: Ownership of Agency Ideas, Plans and Work - IPA: 피치 프로세스를 ‘덜 낭비적이고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가이드
The Good Pitch - 4As: RFP 참여 전 ‘상대/기회 평가’에 도움이 되는 체크 관점
Agency Prospect Assessment Guidance
이런 자료들을 참고해, “우리 팀의 참여 조건(정보/범위/시간)”과 “클라이언트의 평가 조건(기준/가중치/의사결정)”을 서로 맞물리게 설계하면, 피치가 길어지더라도 흔들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